영국 노동당의 선택, '카멜레온' 혹은 '구원자'

2026-06-23 23:36
 영국 노동당을 이끌어온 키어 스타머 총리가 취임 2주년을 앞두고 전격 사임을 선언하면서 영국 정계가 거대한 전환점에 섰다. 스타머 총리의 퇴진 발표와 동시에 차기 대권 주자로 가장 강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은 앤디 버넘 전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이다. 버넘은 최근 치러진 보궐선거를 통해 하원에 재입성하며 총리직 수행을 위한 필수 조건인 현역 의원 신분을 확보했다. 그의 의회 복귀는 수세에 몰렸던 스타머 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제 그는 다우닝가 10번지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버넘의 성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의 경로를 보여준다. 1970년 리버풀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노동당에 입당하며 정치적 신념을 키웠다.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뒤 의원실 연구원과 특별보좌관을 거쳐 31세에 고향 인근 북부 지역에서 첫 금배지를 달았다. 이후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앙 정치의 생리를 익혔다. 비록 두 차례의 당 대표 선거에서는 고배를 마셨으나, 이는 오히려 그가 지방 행정가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발판이 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잠시 물러난 버넘은 9년간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을 역임하며 '북부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쌓았다. 특히 팬데믹 당시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봉쇄 조치가 지방 경제에 불이익을 준다며 정면으로 맞선 사건은 그를 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정성 있는 리더로 각인시켰다. 시장 재임 시절 도입한 버스 시스템 공영 모델 개혁은 행정가로서의 실무 능력을 증명한 대표적 성과로 꼽히며, 이는 현재 경제 성장과 공공 서비스 개선을 갈망하는 영국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다.

 

버넘의 정치적 자산은 북부 출신 특유의 솔직한 화법과 유연한 실용주의에 있다. 그는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민간 기업의 역할을 존중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해 왔다. 지지자들은 그가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우파 영국개혁당의 공세를 막아내고 노동당을 재건할 적임자라고 믿는다. 반면 일각에서는 그가 블레어부터 코빈에 이르기까지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른 지도자들 밑에서 모두 살아남았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 카멜레온'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연성이야말로 분열된 영국을 통합할 최적의 도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스타머 총리는 사임 발표와 함께 다음 달 초 당 전국집행위원회를 거쳐 9월 의회 개회 전까지 차기 대표 선출을 마무리하겠다는 일정을 공개했다. 노동당 규정에 따르면 당 대표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소속 의원 20% 이상의 지지가 필요한데, 버넘은 이미 이 기준을 훌쩍 넘긴 81명 이상의 지지 세력을 확보한 상태다. 현재까지 버넘에 대적할 만한 뚜렷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변이 없는 한 그는 7월 중순 노동당의 새 수장이자 영국의 차기 총리로 추대될 것이 확실시된다.

 

버넘은 사임 발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국가를 국민이 바라는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생활비 위기와 주택 문제, 다음 세대를 위한 기회 창출 등 민생 현안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런던 중심의 엘리트 정치에 지친 영국 사회가 북부의 실무형 리더인 버넘을 선택할 준비를 마친 가운데, 그의 다우닝가 입성이 영국의 고질적인 지역 격차와 경제 침체를 해결할 신호탄이 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